제일 빠른 회사가 되기를 거부한 회사
“생활 속에서 발견한 투자” 네 번째 이야기예요. 3편은 기숙사 지붕에 위성안테나를 올려 “남보다 빨리”의 게임을 연 열아홉 살로 끝났어요. 그리고 그 속도 게임은 이후 40년 동안 괴물이 됐죠. 마이크로초를 다투고, 거래소 옆에 서버를 두고, 도시 사이에 전용 회선을 까는 수천억짜리 군비경쟁이요.
오늘의 주인공은 그 경쟁의 정점에서 등장했어요. 그런데 이 회사가 유명해진 이유가 재미있어요. 그 게임에 참가하기를 거부해서예요.
이번 편은 처음으로 만화로도 만들어봤어요. 14컷으로 먼저 보시고,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로 이어가셔도 좋아요.

수학자가 차린 회사
알렉산더 게르코는 모스크바국립대에서 수학으로 박사까지 마친 사람이에요. 도이치뱅크에서 퀀트 트레이딩을 하다가, 2015년 런던에서 자기 회사를 차려요. 이름부터 수학자답게 지었어요. XTX — 통계학을 배운 분이라면 웃으실 텐데, 회귀분석에 나오는 행렬 기호 X’X(엑스 트랜스포즈 엑스)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이 블로그가 환율 글에서 매번 돌리는 그 회귀분석이요. 그러니까 회사 이름 자체가 “우리는 데이터를 회귀분석하는 회사”라는 선언인 셈이에요.
이 회사엔 세상 사람들이 아는 “트레이더”가 한 명도 없어요. 직원 200명 남짓이 전부 수학·물리·컴퓨터 출신의 연구자와 엔지니어이고, 매매 결정은 전부 모델이 내려요. 금융회사라기보다 “어쩌다 트레이딩을 하는 연구소”에 가까워요.
“우리는 빠른 회사가 아닙니다”
업계 전체가 1마이크로초를 더 줄이려고 싸우던 시절, XTX의 공동 CEO 자르 암롤리아는 이렇게 말해요.
“우리는 지연시간에 민감한 회사가 아닙니다. 시카고와 뉴욕 사이 내 전용 회선이 충분히 빠른지 걱정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빠르기만 하고 리스크는 지지 않는 것이 시장에 가치를 더하는 사업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속도로 못 이기면 뭘로 이길까요? XTX의 답은 예측이었어요. 남들이 밀리초 뒤의 가격을 두고 경주할 때, XTX는 몇 분에서 몇 시간 뒤의 가격을 남들보다 정확히 맞히는 데 모든 걸 걸었어요. 5만 개가 넘는 종목의 가격을 기계학습으로 예측하고, 그 예측을 바탕으로 호가를 내는 거예요. 물론 이것도 군비경쟁이긴 해요. 다만 회선이 아니라 연산의 군비경쟁이죠. 아이슬란드에 GPU 슈퍼컴퓨터를 두고, 핀란드에 10억 유로짜리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으니까요.
게임을 바꾼 결과
성적표는 이래요. 창업 4년 만에 세계 1위 현물 외환 유동성 공급자가 됐어요. 골드만삭스, JP모건 같은 거대 은행들을 제치고요. 지금은 하루에 2,500억 달러를 거래하고, 2024년 한 해 세후이익이 13억 파운드였어요. 직원 한 명당으로 나누면 업계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회사 중 하나예요. 게르코 본인은 몇 년째 영국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고요.
여기서 3편의 문장을 다시 꺼내볼게요. 엣지는 종목이 아니라 게임을 고르는 데서 나온다. 그리핀은 자기가 이길 수 있는 게임(속도)을 골랐고, 그 게임이 모두의 게임이 되어 이길 수 없게 되자, 게르코는 판을 옆으로 옮겼어요. 같은 시장, 같은 상품인데 경쟁의 축을 속도에서 예측으로 바꾼 거예요. 최고의 플레이어는 남의 게임을 이기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이기는 게임을 새로 정의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질문
이쯤 되면 눈치채셨을 거예요. 이 시리즈의 영웅들이 하나같이 하는 일은 “더 열심히”가 아니라 “어디서 싸울지”를 정하는 일이에요. 린치는 월가가 안 가는 마트에서, 버핏은 모두가 도망친 폭락장에서, 그리핀은 아무도 안 하던 속도에서, 게르코는 모두가 속도에 몰두할 때 예측에서 싸웠어요.
그리고 솔직한 결론도 하나 더요. 속도전에 이어 예측전도 이제 GPU 수만 장의 게임이 됐어요. 개인이 낄 자리는 여기에도 없어요. 그럼 개인의 자리는 어디냐 — 3편의 답이 그대로 유효해요. 기관이 못 가진 두 가지, 생활 반경의 관찰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요. 영웅들의 무기를 부러워할 게 아니라, 그들이 무기를 고른 방식을 배우면 돼요.
이번 편의 문장이에요.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면, 더 잘할 게 아니라 다른 게임을 찾아라.
이 시리즈의 사례들은 독립된 출처 2개 이상으로 교차 확인해 소개해요. XTX 관련 수치는 위키피디아, Risk.net(암롤리아 인터뷰), Finance Magnates, Yahoo Finance 등 복수 보도가 일치해요. 투자 조언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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